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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해석 -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중심으로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를 처음 읽었던 때는 학생 때이므로 까마득하게 오래전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소설의 이미지는 잊혀지지 않는 묘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혹자는 극단적으로 센티멘탈적이라며 혹평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이 소설은 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깨달음을 주었던 소설입니다.

 

그리하여 최근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다시 읽게 된 바,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중심으로 이 소설이 어떤 구조와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해석을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아래는 상실의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으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주인공 와타나베가 그의 연인 나오코를 잃고 슬픔에 방황하며 독백하는 위의 구절은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반대편 끝, 즉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저 구절을 읽을 때는 정말로 소름이 돋았었습니다.

 

상실의 시대는 커다란 줄기로 보면 주인공 와타나베가 그의 연인 나오코를 잃는 과정, 즉 죽음에 대한 체험이며 이 소설의 모든 플롯은 죽음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회전합니다. 그리고 나오코의 상실로 인한 괴로움을 전하는 독백에서 그는 그녀의 상실을 죄의식으로 풀어내고 있죠.

 

소설 1장의 제목은 아련한 추억 속의 나오코입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보잉747 좌석에 앉아 있는데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음악이 흐르자 무의식적으로 인생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초원의 풍경을 떠올립니다. 그 초원에서 나오코는 주인공에게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후 주인공은 그 우물의 모습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물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자면 죽음에 대한 은유라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첫 부분의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이미 나오코는 이미 자신의 생의 끝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며 동시에 그녀 자체가 죽음에 대한 은유임을 암시합니다.

 

그리하여 나오코에게 우물의 이야기를 들은 와타나베는 우물의 모습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즉 죽음(우물) 없이는 삶(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이는 곧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내재해 있다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상실의 시대는 큰 줄기에서 나오코를 잃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여기서 그녀는 와타나베의 삶 속에 내재된 명명된 죽음의 이미지 혹은 은유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나오코의 상실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나오코는 단순히 죽음이라는 이미지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다른 이들과 동등한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젊은 날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가련한 여인이라는 단순한 문학적 은유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있어 나오코는 단순히 친구, 연인, 아는 사람이라는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선 나오코는 과거 주인공 와타나베의 친구였던 기즈키의 연인이었습니다. 기즈키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죠. 이는 연속성을 가지고 나오코 역시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또한 두 사람은 기즈키의 상실을 공유하던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나오코는 기즈키 함께 했던 세 사람 시절로부터 이어져 오는, 일종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기즈키를 상실한 이후에는 죽음의 연속성, 그리고 필연성으로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특질을 지닌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표현됩니다. 

즉 나오코는 주인공에게 있어 고유하게 명명된 죽음의 이미지로, 단순한 문학적 은유에 그치지 않고 그의 실제적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삶에 내재된 죽음입니다. 상실의 시대는 시작 부분의 회상부터 소설의 끝까지 나오코라는 고유한 이름의 죽음이 주인공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종극에 기즈키 때와 마찬가지로 나오코를 상실한 주인공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며, 그것은 연속되어 주인공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여전히 와타나베라는 주체를 죽음의 길에 놓여있게 하고 있습니다.

 

나오코의 상실 이후 주인공은 여전히 무의식의 차원에 그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 진리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문학에서나 그렇듯, 죽음의 이미지는 실존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서 나오코라는 죽음의 이미지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실존의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그가 그녀의 상실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글 첫 인용구에서 와타나베가 그녀를 잃고 슬픔에 겨워 방황하고 독백하는 장면에서 심히 소름이 돋았다고 했는데 나오코를 보낼 수 없다는 욕망을 죄(罪)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독백하듯 과거 친구 기즈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이러한 나오코를 보낼 수 없다는 그의 바람을 체념으로 대상에 묶어두게 되죠. 기즈키 때부터 흘러온 고유한 역사성과 연속성 때문에 그는 나오코의 상실에 대해 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성은 상실의 시대에서 넘어설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표현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떠나보낼 수 없는 나오코를 무의식으로 밀어 넣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도 무의식 속에 나오코라는 죽음이 함께 함으로써 죽음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의식이 중요한데, 이러한 무의식이라는 미로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주체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없었던 것과 동시에 실존은 가능성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죠. 소설이 이러한 무의식의 차원을 상징하는 초원, 어둠 등의 이미지에서 시작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가 말하는 명제의 근간에 있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성과 그로 인한 무의식의 존재로 주인공은 지금도 나오코의 그림자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결국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의 삶을 통해 위의 명제를 깨달아 가는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 속에 나오코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위의 명제에서 "그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오코의 상실 이후 그녀를 자신의 무의식 속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오코와 함께하고 있고, 따라서 그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의식이 중요했던 것은 이 때문이며, 또한 이 무의식이 그가 길을 잃고 실존의 가능성을 그저 가능성으로 남겨두게 한 핵심입니다.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상실의 시대와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코브는 와타나베, 멜은 나오코이며 무의식적 차원은 꿈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와타나베의 무의식 차원에 나오코가 있듯, 코브의 무의식의 세계, 즉 꿈의 세계에 멜이 있습니다. 동시에 멜의 상실은 그의 실제적 삶을 지배한다는 점에서도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과 같습니다. 또한 상대에게 죄책감 혹은 죄성을 가지고 있는 점 역시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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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있다면 코브 같은 경우는 꿈이라는 무의식 차원의 멜을 마주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코브는 와타나베와 달리 실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위는 과거 작성했었던 인셉션에 대 한 글입니다.

 

[마치며]

결국 상실의 시대는 나오코라는 고유한 죽음의 이미지가 와타나베의 삶을 지배하고 주체를 절망의 길로 이끌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실존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매우 개인적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들 개개인들은 모두 나오코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태는 다를지언정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각자의 고유한 무언가를 말이죠. 따라서 이렇게 생각해볼 때 와타나베의 삶은 굉장히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에 그 시절 굉장한 공감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그 시절 이 소설을 보며 많은 공감을 했고 동시에 와나타베의 삶의 궤적을 통해 문학이란, 삶이란 무엇인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상실의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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