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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해석 - 새로운 신화를 찾아서 본문
[개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현대화된 신화적 모티브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합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될 인류 공통의 신화로서 감독이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적 지향점임과 동시에 세계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치히로라는 어린 소녀의 모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피어오르게 합니다. 왜 우리는 이 영화에 매료되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내적 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화라는 것은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 모험이 시작되고,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러한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 나오는 순간이며 동시에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오는 것이죠.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보여주었던 여행과 같이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우리의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아래는 이러한 신화적 관점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해석이며, 동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해석 - 새로운 신화를 찾아서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인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며 시작됩니다.
그 입구인 터널은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고 동시에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버지는 말합니다.
바람이 터널 쪽으로 향하면서 치히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는 곧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고 터널을 지나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세계, 즉 신화의 세계였습니다.
신들의 세계에서 허락 없이 음식을 먹은 부모님은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 세계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라지게 되는 위기에도 처하게 되죠. 그리고 이 신들의 세계에서 치히로의 영웅적 모험이 시작됩니다.
치히로가 들어간 세계는 일본의 전통 신들의 세계로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유바바 지배하는 온천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이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러 오는 목욕탕"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신화적 세계는 매우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 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산업화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신들의 세계에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차가 지나다니는 것 역시 이를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요.
이 세계에서 치히로는 사랑하는 부모와 자신의 이름 치히로를 잃고 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신화의 세계에 진입하기 전 아버지가 터널이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고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듯, 이 신화의 세계 역시 우리의 현시대를 상징하는 현실의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치히로라는 순수한 어린 소녀가 신들의 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즉 신화의 세계라는 것은 우리 삶의 영적 잠재력은 찾는 것이 아닌, 현실보다 더 가혹한 현실입니다.
어린 소녀 치히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들의 세계에서 꿈과 희망이 아닌, 가혹한 현실의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는 살아남기 위해 계약서에 사인하고 이름을 빼앗기면서 세상의 부품으로 전락하고만 것이죠.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상징적으로 이 신화적 장소는 오히려 물질만능주의가 신화화된 세계라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인 것으로, 신도 그를 모시는 신도들도 모두 교환가치에 매몰된 세계인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신봉받는 신화의 세계인 것이죠.
센이 겪는 이러한 신화의 세계관의 아이러니한 설정은 정말로 천재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감탄이 나옵니다.
물러설 곳이 없게 된 센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며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센의 행동 메커니즘은 다른 사람들과는 명확하게 다릅니다. 바로 이 세계의 규칙인 교환가치에 매몰되지 않는 유일한 인간적 감정을 유지하고 있기에 빛나기 시작하죠.
즉 이름을 빼앗겼지만 자기는 잃지 않는, 외적 가치에 집착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잃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신들의 세계에서 신이 아닌, 센을 통해 살아 있음과 삶의 내적가치의 중요성을 살아 있음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는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는데, 본래라면 외적가치에 집착하여 우리에게 내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신화이지만, 반대로 여기서는 신화의 세계가 외적 가치에 매몰되고 센이 내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오물의 신이 찾아옵니다. 센은 오물신이 씻는 것을 도와주다가 그에게 가시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모두 합쳐서 가시를 빼내고 오물 신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강의 신이었던 것이죠.
강의 신은 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경단 하나를 줍니다. 하지만 배금주의를 신봉하는 유바바를 비롯한 이들은 강의 신에게서 나온 금을 보며 환호하죠. 센이 강의 신에게 받은 경단은 후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인 하쿠를 구하는, 자본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는데 말이죠. 센이 아니었으면 강의 신은 자신의 본모습을 영영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이 온천의 본질적 역할입니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의해 굴러가지만 온천이라는 장소의 본질적 목적은 휴식과 정화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물질만능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 있는 센은 오물의 신을 정화함으로써 이 장소의 본질적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한 존재입니다.
(이방인인 가오나시 역시 센을 만난 이후로 온천에서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정화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자본을 신봉하는 유바바의 세계는 이러한 이질적인 존재인 센으로 인해 조금씩 틈이 발생합니다. 센이 문을 열어두어 외부자 혹은 이방인인 가오나시가 온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유바바의 슈퍼 베이비는 두 발로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배우고 사랑하는 하쿠를 위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망설임 없이 가기로 합니다.
이는 자본이라는 규율에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잃지 않고 나아가는 영웅적 모습입니다.
가오나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면 가오나시는 이름 그대로 얼굴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바바의 온천, 즉 자본의 중심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기도 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명확하게 장소적 배경이 양분되어 있는데 바로 유바바의 온천과 그 바깥입니다. 이 온천 안쪽이 자본을 신봉하는 체제의 중심이고 온천 밖은 바로 이러한 체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흐릿하며, 다른 이들은 그를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가오나시는 체제의 바깥의 인간, 즉 소외된 존재를 의미하는데 센에게 그는 외롭다는 말을 하며 건네는 것은 가짜 황금이었습니다. 그는 온천이라는 자본 체제의 중심에서 그 수단을 이용해 가짜 황금을 뿌리며 관심을 받고 끝없이 먹어치우며 괴물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센에게도 가짜 황금을 건네죠. 하지만 센은 온천의 체제에 예속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리고 센은 강의 신이 건넨 경담을 가오나시에게 먹이자 그는 폭주하기 시작하고 온천에서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냅니다.
이렇게 더러운 것을 토해내고 정화하는 온천의 본질적 기능을 잘 행하는 것은 센입니다. 센 덕분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오나시는 그가 행했던 교환가치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묵묵히 그녀의 곁을 함께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답이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 가오나시는 센과 함께 기차를 탈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센이 하쿠를 구하기 위해 향한 곳은 온천의 바깥이며, 이러한 체제의 바깥으로 향하는 길은 하쿠를 구하는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존재가 도구처럼 취급되는 유바바 온천의 바깥은 어떤 풍경일까요?
그곳은 가오나시와 같이 소외된 자들이 사는 곳이며, 이곳의 풍경, 그리고 가나시와 같이 투명한 형태의 그들은 외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제니바의 집에 닿은 그들의 삶에는 인간적인 면이 물씬 풍깁니다. 그들이 모두 함께 일해서 만든 것은 치히로에게 주는 부적이었던 것이죠. 즉 이곳은 모두 함께 공동체적으로 일하고 치히로를 생각해 부적이라는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드는 그러한 공간인 동시에 자아실현의 장소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바깥에서 그들은 함께 부적을 만들며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동시에 있을 곳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유바바의 아들은 두 발로 땅에 설 수 있게 되죠. 이는 더 이상 의존적이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로서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온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센은 하쿠의 이름 역시 기억하게 됩니다. 센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투쟁으로 하쿠는 자신의 이름, 자신의 운명을 찾게 되고 센은 영웅적 소명을 완성하게 됩니다.
제니바는 센에게 자신과 유바바는 둘이 합쳐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마음이 맞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중심인 세계가 인간적 가치를 통합시켜야 된다는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감독은 센의 모험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결말에 이르면 유바바의 온천의 분위기는 물질만능주의적 분위기에서 활기차고 인간미 넘치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변합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보면 위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 불렀어요.
유바바의 온천에서 그들이 도구처럼 그저 쓸모에 의한 것, 부품 혹은 그것이 아니라 센처럼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따뜻한 마음을 담아 "그대"라 부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녀는 이미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적 가치임을, 그리고 치히로의 영웅적 신화를 통해 조화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통해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