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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해석 공존 가능한 세상을 꿈꾸다

[카페인] 2021. 11. 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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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개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걸작 모노노케 히메. 정말 애니메이션을 보고 감동받아서 박수를 쳤습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 이야기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영화의 관점이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굉장히 다면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파괴와 대립이라는 것이 어느 한쪽의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입체적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통해 상당히 균형 잡히면서도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존 가능한 대안을 내세운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 초자 세상을 둘러싼 다양한 요인에 의한 환경적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는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인 감상입니다.

 

[모노노케 히메 줄거리]

어느 부족의 차기 족장인 아시타카. 어느 날 타락한 신이 나타나 그가 사는 마을을 공격합니다. 이에 그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신에 대항하고 결국 쓰러뜨리지만 전투 중 저주 서린 상처를 입습니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의 탄생 원인과 그 저주를 치료하기 위해 무녀의 점괘에 따라 서쪽으로 떠나 타타라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마을 군주 에보시와 만납니다. 그리고 멧돼지가 재앙신이 되어 자신의 마을의 습격했던 이유가 이 마을이 철을 캐기 위해서 자연을 훼손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타라 마을을 굉장히 기묘합니다. 연기를 내뿜는 제철소의 모습과 나무로 방벽을 친 모습은 단절의 이미지로 대자연 속에서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외형과 대조적으로 마을 내부는 굉장히 밝고 활기차고 사람 향기가 많이 나는 곳이죠.

 

에보시는 마을 내에서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을 내 사람들은 서로 평등하고 그녀를 사랑합니다. 사실 마을 밖은 무법지대와 다름없습니다. 다들 살기 힘들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지옥도입니다. 하지만 타타라 마을 내부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이 철을 캐기 위해 자연과 대립하는 것은 하나의 생존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숲의 신들과 대립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지역의 영주들과도 대립하는 중이고요. 아시타카는 숲에서 인간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늑대신 모로와 늑대에게 길러진 소녀 산을 만납니다. 자연과 인간 모두는 서로의 생존을 두고 대립 중이며 그들의 관점 역시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립을 막으려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모노노케 히메 해석]

모노노케 히메의 주목할만한 점은 자연을 수동적이고 신비주의만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숲의 신들은 완벽한 존재도 아닐뿐더러 이성적이고 현명한 존재도 아닙니다. 이것이 모노노케 히메가 입체감과 다양한 관점을 취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원숭이와 멧돼지들의 행동에서 보듯 자연은 배타적이고 잔혹하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냉정한 행동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내부에서도 서로 간의 다른 생각에 의한 대립도 존재합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자연은 삶의 투쟁에 있어 어떠한 타협도 모릅니다. 멧돼지들과 늑대들은 실패할 운명임을 알고 인간들과 절망적인 싸움을 벌입니다. 자기 종이 멸절할 것을 알면서도 돌진하는 멧돼지 신의 선택은 현명하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선택은 굉장히 이분법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면서 늑대신 모로에게 길러진 산은 자연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이들을 대변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모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숲에 속해 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숲에 녹아든 인물은 아닌 것이죠. 작중에서 숲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모로와 옷코토누시를 비롯한 숲 속의 신들입니다.

 

숲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숲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타타라 마을의 입장에서 보면 약한 자, 병에 걸린 자들을 돌보고 모두가 평등한 삶, 동시에 생존을 위한 공동체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턱대고 악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시각을 보여줍니다. 숲의 신들은 인류가 상승 종으로서 팽창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류는 그들의 변화하는 생존 방식을 위해 숲의 신들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1) 시시가미

종극에 이르러 사람들은 사슴 신 시시가미를 공격합니다. 시시가미는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시시가미는 신들의 절대자 같은 존재, 다른 숲의 신들과 급이 다른 지고의 존재임이 명확해 보입니다.

 

다른 신들이 숲을 지키기 위해 생사를 걸고 인간들과 전투를 벌이고 숲은 불타는데 시시가미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습니다. 숲의 주인인 그가 숲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해 보입니다.

 

시시가미는 생과사를 담당하는 신입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식물이 싹을 틔우고 시듭니다. 그는 대자연의 법칙 그 자체입니다. 생과사를 담당하는 이 신은 아시타카가 위태로울 때 그를 살려주지만 그의 필사의 저주는 남겨둡니다.

 

반면 옷코토누시가 파멸로 이르기 전 그의 생을 거두어들입니다. 그것은 그래야만 하는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인간과 숲의 신들의 전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서로의 가치판단에 의한 일련의 상황 혹은 다양한 요인에 의한 환경적 산물일 뿐, 그가 개입할 대자연의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는 코다마들...

종극에 인간들은 이 시시가미의 일부를 가지고 달아나고 그 순간 세상은 모든 것이 멸하는 파도로 뒤덮입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부분입니다. 대자연의 법칙, 정해진 어느 선을 넘으면 그것은 세상을 이렇게 무서운 재해로 모든 것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위반 앞에는 어떠한 자비도 없습니다.

 

2) 산과 아시타카

모노노케 히메에서 주인공 아시타카는 굉장히 특별한 캐릭터입니다. 그는 인간 그리고 자연과 모두와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로, 숲의 신들과 대화 가능하고 동시에 사람들과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타카는 중립적이며 동시에 중재자가 될 가능성도 지니고 있는 인물입니다.

 

숲의 신들과 인간은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은 어렸을 때 늑대의 아래에서 컸기 때문의 숲의 동물들과는 대화가 가능하지만 사람들의 언어는 알지 못합니다.

 

갈등의 원인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소통의 부족이 아니었을까요? 아시타카는 양측 모두와 대화 가능하며, 포용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가 인간들이 적대하는 산을 구하다 다쳤을 때, 그리고 산이 아시타카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도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합니다.

 

시시가미의 재앙으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그 자리는 시시가미에 의해 다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남겨져 있습니다. 양자를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에 남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에 산은 "아시타카는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웃으며 말합니다.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살아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살게."

 

산은 늑대 신의 딸로서 숲에 속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입니다. 그녀는 아시타카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숲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인 동시에 자연에 속해 있는 그녀는 하나의 희망입니다. 자연과 인간 모두에 걸치고 있으며 아시타카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듯, 밖의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다시 새로운 희망을

시시가미 사건을 통해 숲의 동물들도 사람들도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끝없는 대립보다는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것을 그 속에서 배웠을 겁니다. 아시타카에게서 저주를 거두어갔지만 흉터 자국이 남은 것은 경각심입니다. 동시에 이는 더 나은길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에 대한 희망을 남겨두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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