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팬텀 스레드 줄거리 및 결말 해석]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팬텀 스레드를 보았습니다. 의상 디자이너의 이야기라는 신선한 소재와 팬텀 스레드, 즉 보이지 않는 실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사랑의 일면을 날카롭게 표현한 것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이 사랑이라는 것은 유익한 것이 아닌, 사람을 좀먹는 것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망자의 이미지와 절망의 속성을 띠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삶에 내재하는 요소임을 영화는 치밀하게 말해줍니다. 제목에 팬텀(Phantom), 즉 유령 혹은 혼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이와 같은 속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흘러가는 이야기와 그 구성이 하나의 문학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팬텀 스레드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왼쪽: 레이놀즈 / 오른쪽: 알마

펜텀 스레드의 주인공 레이놀즈는 뛰어난 제단사입니다. 그의 집은 그 자체가 옷을 만드는 작업 공간임과 동시에 자신이 생활하는 일체화된 공간인데 이는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적 재혼으로 그를 떠났습니다. 떠나는 엄마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만드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드레스를 만드는 일 자체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상실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인공 레이놀즈가 사는 공간, 즉 그의 일상 공간과 드레스를 만드는 공간이 일체화된 것은 이러한 상징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삶은 근본적으로 사랑했던 어머니에 대한 상실을 내재하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혹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어머니를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대상적 자동성으로 발현되어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과 대상적 자동성(상실)이 일체화된 공간인 집은 이러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확장해보면 이 집이라는 공간은 레이놀즈의 삶 그 자체 혹은 그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전 여기 살아요" - by알마

레이놀즈가 벨기에 공주의 의뢰로 드레스를 만들고 있을 때 여주인공인 알마가 공주에게 다가가 난 여기 살아요라 말하는 장면은 레이놀즈 자체를 소유한다는 의미, 이러한 측면을 냉철하게 꿰뚫었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결국 이야기를 상징적인 측면에서 요약해보자면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내며 드레스를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으며,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원적 상실감, 그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대상적 자동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낼 수 없다는 그의 마음, 즉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적 삶이며 이것은 주체의 의지가 무엇이든 간에 욕망을 대상에 묶어두는 것이죠. 주체를 이러한 상실의 죽음 혹은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러한 욕망의 대상적 자동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팬텀, 유령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데 이것은 레이놀즈의 삶이 실제와 대극에 있는 하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영화 팬텀 스레드를 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옷에 엄마 사진을 꿰매어 두고 다니는데, 이때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점은 이를 잘 나타냅니다. 결국 주인공이 다른 여자들을 위해 드레스를 만드는 것은 이러한 저주받은 상실감의 연속된 절망의 형태입니다. 결국 레이놀즈에게 사랑이란 근원적 상실감을 내재한 대상적 자동성으로서 필연적으로 절망의 형태로 전개되는 하나의 삶의 형태입니다. 주인공 레이놀즈에게 사랑이란 대상적 자동성을 불러일으킬 때 작동하는 형식입니다. 이것이 그가 다른 여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였지만, 반대로 결말에 이르러 알마를 받아들이는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이러한 측면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과 동시에 어머니를 대신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물입니다.

 

우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과거 레이놀즈가 어머니를 추억하는 집입니다. 알마를 만난 곳이 이러한 장소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왜 결혼하지 않았냐고 물어봅니다. 주인공은 거기에 대한 답으로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이는 역시 어머니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며, 영화에서 유령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면 알마가 해야 될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드레스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 즉 레이놀즈의 어머니 유령을 지워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바바라 로즈에게 만들어 준 드레스는 알마에 의해 퇴출당합니다. 바바라 로즈는 레이놀즈에게 어머니를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주인공 자신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 결혼을 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알마가 바바라에게 드레스를 회수할 때 퇴출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을 떠난 어머니의 웨딩드레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때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키스를 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벨기에 공주의 드레스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다시 들어옵니다. 이에 주인공은 다시 옷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알마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가 다시 드레스를 만들게 된다면 그녀는 그를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껏 바바라의 드레스를 퇴출시켰는데 말이죠. 그리하여 알마는 최후의 수단을 쓰게 되는데 바로 득버섯을 레이놀즈의 음식에 섞어 넣게 되죠. 이에 레이놀즈는 아프게 되고 옷은 망쳐집니다. 그리고 알마는 벨기에 공주의 드레스에 붙어 있는, 나는 저주받지 않았다는, 어머니에 대한 대상적 자동성을 상징하는 문구를 떼어내 버립니다. (어머니를 마음에서 놓아줄 수 없이 얽매여 있으며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의 세월을 지속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알마가 준 버섯 요리를 먹고 사경을 헤매는 레이놀즈에게 어머니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그는 유령에게 말합니다. “늘 여기 계세요? 보고 싶어요. 늘 엄마 생각을 해요. 날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꿈에 들려요. 그러다 깨면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요. 그냥 늘 엄마가 보고 싶어요” 주인공의 속삭임에도 엄마 유령은 끝내 침묵합니다. 그리고 알마가 등장하고 그녀는 엄마 유령과 같은 프레임에 있다가 알마 혼자 남게 됩니다. 엄마 유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이렇게 알마는 자신의 등장으로 어머니 유령을 사라지게 만들고 어머니를 대체함으로써 주인공을 전적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드레스를 없앴으니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일에 모든 걸 쏟아부으면 가끔 한 번씩은 무너지게 되나 봐요. 그럴 때 그는 아기가 돼요.

-by 알마-

그렇다면 알마는 레이놀즈를 어떻게 전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의 어머니에 대한 대상적 자동성을 지워버릴 수 있었을까요? 이는 우선 그녀가 레이놀즈의 이러한 대상적 자동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일에 모든 걸 쏟아 붓고 한 번씩 무너지게 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녀는 어린 아이를 돌보듯 주인공을 돌봅니다. 마치 그의 어머니처럼요. 이 장면과 과거 대화를 통해 그녀는 자동성의 대상을 변화시켜야 된다는 것을 때닫고 있었죠. 그리고 그 수단은 그녀가 주인공에게 먹인 버섯 때문입니다. 동시에 아픈 주인공을 돌보는 어머니를 연상케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죠. 레이놀즈의 대상적 자동성이 드레스에서 버섯을 먹는 것으로 인한 고통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어머니에 의존하여 드레스를 만든다라는 행동을 알마에 대한 의존적 행위로 버섯을 먹는 것으로 치환된 것이죠.

 

팬텀 스레드 중후반부에도 나오듯 레이놀즈는 알마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고 누이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알마는 버섯 요리를 하고 그것을 먹으면 아플걸 알면서도 레이놀즈는 버섯 요리를 먹습니다. 알마는 어머니를 대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드레스를 만드는 대신 버섯 요리를 먹고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했듯 대상적 자동성으로서 절망, 쇠약화의 형태로 전개되는 하나의 의존적 삶의 형태입니다.

 

팬텀 스레드 결말 장면은 처음 장면과 이어집니다. 알마가 하디에게 말하는 장면이죠. 버섯을 먹고 쇠약해져 아픈 레이놀즈를 위해 혹시 몰라 하디를 부르고 알마가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영화의 가장 처음과 끝에 배치됩니다. 결국 이 사랑에서 힘의 역학은 알마가 쥐게 된 것이며, 그녀는 승리했고 레이놀즈를 전적으로 소유하게 된 것이죠.

 

“상관없어요.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저승에서든 어느 별에서든 만날 테니까요.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에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기다리기만 하면 우린 또 만날 거예요. 그를 사랑하면 인생의 모든 게 다 아주 확실해지죠”

“당신 드레스들도 잘 간수할 거예요 먼지와 유령과 세월에 빛바래지 않게”

-by 알마-

그리고 팬텀 스레드 엔딩에서 알마를 위한 드레스를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거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던 것처럼요. (물론 이제는 어머니를 위한 드레스를 더는 만들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 대상이 알마로 바뀌었습니다. 알마는 완전히 레이놀즈를 소유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알마의 말처럼 그렇게 두 사람 사랑은 영원성을 담고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받은 형태일지는 관객에게 남겨두고 말이죠.

 

[팬텀 스레드 뜻]

마지막으로 영화의 제목인 팬텀 스레드 뜻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팬텀 스레드에서 팬텀(Phantom)의 뜻은 유령입니다. 스레드(thread)는 실을 의미하죠. 팬텀은 영화 내에서 유령으로 나오는 어머니이고 스레드는 어머니와 연결된 실, 혹은 연결고리이며 이는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레이놀즈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레스를 만드는 것 역시 실과 연결된 것입니다.

 

결국 팬텀 스레드 뜻은 자신을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 자신을 떠나갔지만 마음으로는 떠나보낼 수 없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드레스를 만드는, 대상적 자동성으로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어머니를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레스를 만드는 것이죠. 이것이 팬텀 스레드의 영화적 해석으로서의 의미입니다. 하나의 의존적 사랑의 형태인 것이죠. 그리고 그 실은 이제 알마에게로 연결되고 두 사람은 그녀의 말대로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