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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소한 일상
그을린 사랑 결말 포함 줄거리 및 해석 – 비극을 넘어서 본문
[그을린 사랑 개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감상 후 뭐랄까... 정말 소름 돋으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그 시대의 불행에 휩쓸린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나왈 마르완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탐색하고, 그녀의 과거를 통해 그 시절의 비극의 전말을 밝힙니다. 동시에 이는 연속성을 가지고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을 절실히 각인시켜주는 영화였습니다.
이러한 연속성은 주인공 나왈 마르완의 별세 이후 그녀의 쌍둥이 남매가 그녀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과거를 탐색하고 이를 이해하는 과정이 수반됩니다. 이 과정은 어머니의 직상 상사인 장 르벨이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공적으로 알리면서 시작되죠.
공적으로 알린다는 것에는 영화를 만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는데 이는 그녀의 유언이 신성하고 의무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탐색의 끝에 마주하는 진실은 그을린 사랑 결말에서 비극을 극대화하고, 동시에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나아가야 될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나왈 마르완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로 보아도 무방한데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결말 부분 뒤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그을린 사랑의 줄거리와 결말로 결말과 해석은 마지막에 따로 두었으며 스포일러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줄거리]
우선 그을린 사랑의 배경은 레바논 내전 때입니다. 레바논은 과거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아주 오래 동안 지속되었었고 그 긴 시간만큼의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과거의 실제 있었던 사건 및 오이디푸스 신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라디오헤드의 음악이 나오면서 삭발하는 소년과 이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로 시작됩니다. 군인이 되려는 혹은 이를 강요받는 모습의 차가운 느낌이 드는 장면입니다. 그 소년은 눈빛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분노에 차 있는 듯한 눈빛으로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를 노려봅니다. 라디오헤드의 몽환적인 음악이 깔리면서 부조리하고 복잡하고 강렬한 인상을 관객들에게 심어주면서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노래는 계속되며 영화의 시점은 현재로 이어지고 한 남자를 클로즈업합니다. 그 남자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혹은 애도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끝이 남과 동시에 그 남자는 그을린 사랑의 주인공 나왈 마르완이라 적힌 서류를 찾아 쌍둥이에게 건네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묘비명을 새길 자격이 없다.”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졌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새우고 이름을 새기거라”
-나왈 마르완-
어느 날 캐나다의 이민자 나왈 마르완이 눈을 감게 되고 장 르벨은 그녀의 쌍둥이 남매에게 그녀가 남긴 유언을 전합니다. 딸인 잔느 마르완에게는 아버지에게, 아들 시몬에게는 형에게 편지를 전해주라 합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이상함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껏 아버지와 그들의 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이 유언이 잘못된 것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잔느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로 결심하고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과거를 탐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과거가 영화에서는 회상을 통해 재구성되기 시작하죠.
주인공 마르완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 과거 무슬림 난민과 사랑에 빠졌었습니다. 가족들 입장에서 이는 금기와 다름없었고 그리하여 오빠들은 그녀의 연인을 해하고 그녀까지 불명예에 대한 벌로 함께 보내려고 했지만 할머니의 만류로 그녀는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아이를 가졌었는데 할머니 덕분에 이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만 허락되지 않은 이 아이는 발 뒤꿈치에 점 세 개를 찍는 표식을 한 뒤 보육원으로 보내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와 이별하고 만 것이죠. (영화 첫 장면에 나온 분노에 찬 눈빛을 보인 그 아이)
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내전이 발발하고 마르완은 피난을 가는 대신 그녀의 아이를 찾으러 고향으로 다시 내려갑니다. 하지만 보육원은 이미 잔해만 남은 상태였고 다시 아이의 행방을 찾아 나선 그녀는 버스에서 기독교 민병대에게 공격받게 됩니다. 다행히 그녀는 기독교인이라 살아남았지만 민병대가 저지른 참상에 슬픔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녀가 목격한 내전의 참상과 들려오는 소식들에 아들을 찾는 희망을 버리게 되고 이러한 참상을 일으킨 기독 민병대에 분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인은 데르사의 난민이었고(무슬림 쪽) 아들 역시 그들 때문에 전쟁의 참극에 삼켜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슬람 세력에 들어가 스파이로 활동하며 기독 간부를 처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붙잡혀 갇히게 되고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의 관리자인 아부 타렉에게 온갖 괴롭힘, 몹쓸 짓을 겪게 됩니다. 심지어 아부 타렉의 아아도 가지게 되는데, 그을린 사랑에서 나왈의 아버지와 아들을 찾으라는 유언을 받은 두 쌍둥이는 이곳에서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극적이죠.
[그을린 사랑 결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잔느는 시몬에게 어머니가 겪었던 비극을 전달하고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즉시 자신에게로 오라 합니다. 아부 타렉이 어머니가 말한 두 사람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는데...
시몬은 레바논으로 건너가 과거 이슬람 세력의 수장을 만나 어머니의 과거를 듣게 되고 그의 아버지였던 아부 타렉이 아버지임과 동시에 자신의 형이라는 경악할만한 진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즉,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한 관리자였던 아부 타렉은 바로 나왈 마르완이 그렇게나 찾아 헤맸던 아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부 타렉은 나왈 마르완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들이었고(동시에 남편...오이디푸스 신화를 따름), 두 쌍둥이에게는 형이면서 아버지라는 엄청난 비극의 시나리오였던 것이죠.
또한 아부 타렉은 이미 캐나다에 있었고 나왈은 생전 캐나다 수영장에서 아부 타렉을 만났었다는 것입니다. 나왈은 수영장에서 아부 타렉의 발 뒤꿈치의 점 세 개가 찍힌 문양을 보고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부 타렉은 나왈을 마주했면서도 알아채지 못했죠. 그래서 이러한 유언을 두 자녀에게 남겼던 것입니다.
두 남매는 충격을 받지만 어머니가 남긴 유언대로 쌍둥이의 형과 아버지에게 남긴 두 장의 편지를 모두를 아부 타렉에게 건넵니다. 그리고 나왈 마르완의 묘비명을 세운 비석 앞에 아부 타렉이 서 있는 장면을 끝으로 그을린 사랑은 결말을 맞게 됩니다.
[감상 후기 및 그을린 사랑 해석]
그을린 사랑에서 주인공 나왈이 겪었던 참상은 결코 그녀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영화의 주된 핵심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부 타렉의 분노에 찬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고 장 르벨이 묵념하고 있는 장면이 라디오헤드의 노래로 연결된 것처럼 말이죠.
두 남매가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진실에 이르는 길은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굉장히 복잡하고 힘이 듭니다. 이것은 진실로 향하는 길은 이처럼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이러한 참상에 대한 원인과 본질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길인 것입니다.
두 남매는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레바논으로 들어서고 과거 비극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회상을 포함한 그을린 사랑의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타자의 관점을 벗어나 본질로 향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참극에 대해 남매는 타자의 시선을 거두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죠.
(두 남매가 수영장에서 심층 깊이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것은 타자화를 벗어나나 근원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즉 어머니의 생의 비극을 모든 노력을 다해 추적하지 않고 단순히 멀러 떨어진 캐나다에서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다면, 그리고 그러한 비극의 시작을 단순히 사건 하나로만 치부했다면 이러한 비극과 증오는 연속성을 가지고 확대되어 미래로까지 이어질 수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머니의 첫째 아들 아부 타렉이 사랑으로 태어났고 언젠가 너를 찾겠다는, 사랑과 그에 대한 맹세로 시작된 비극임을 그 길을 따라가며 깨달았기 때문에 그을린 사랑 결말은 이러한 비극과 증오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묘비명을 세우는 것은 말 그대로 비석이 세워짐으로써 비극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는 것을 상징입니다.
그을린 사랑 해석적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를 봐봅시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했던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이러한 진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한 결과 눈앞에 놓인 것은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비극이었죠.
다시 말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게 그의 비극이 현실화되어 다가온 것은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마주한 결과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오이디푸스 역시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합니다. 그을린 사랑은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아내면서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신화적 이미지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왈은 이오카스테와 달리 진실을 마주하고도 묵묵히 살아왔다는 것이고, 비극적인 진실일지라도 그녀의 남매에게 진실을 추구하도록 하고 증오를 끊어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운명에 순응하고 좌절했지만 나왈은 진실을 추구하도록 신성한 유언을 남겼고 이는 단순히 운명에 의해 희생당하는 한 개인을 넘어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실현시켰다는 것입니다.
아부 타렉을 포함한 세 자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극을 끌어안고 포용하고 용서하면서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그녀가 아부 타렉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의 죄의식을 덜어주고 너는 사랑으로 세상에 나온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용서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하고 비극의 고리를 끊어내는 비석을 세운 위대한 신화적 존재의 이미지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도록 나왈의 숭고한 의지를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