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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웹소설 - 전지적 독자 시점

[카페인] 2021. 4. 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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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3부 표지 - 싱숑

웹소설 관련 글을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웹툰에서도 이미 유명한 이 소설은 웹소설 상위에 위치해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게 되었는데요,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특히 이 소설이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소설의 소재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일단 시작은 소설 내의 주인공인 김독자가 애독하던 소설인 멸살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이하 멸살법)의 세계가 현실에 덧씌워져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김독자는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소설 멸살법 주인공인 유중혁이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는 어떤 것일까. 그런데 것이 자신의 앞에 현실로 나타나다니. 그리하여 이 소설은 주인공 김독자가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이 소설의 소재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소재들이 웹소설을 처음 보는 저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1. 유중혁이라는 제약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독자는 현실이 된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향해 나아가려고 고군분투합니다. 그는 이 세계가 멸살법의 세계가 되기 전 멸살법을 읽은 전지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김독자도 유일하게 읽지 못한 것이 있죠. 바로 멸살법의 에필로그입니다. 그 에필로그에는 반드시 멸살법의 주인공인 유중혁이 함께해야 됩니다. 그러려고 힘차게 이 소설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거니까요. 따라서 유중혁은 김독자에게는 제약조건과 다름없습니다. 주인공이 죽길 바라는 독자는 없을 테니까요.

출처/인용 : 전지적독자시점

소설 속에서 김독자가 이설화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유중혁은 대의를 위해 이설화를 죽일 것을 요구하지만 김독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유중혁이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죠. 신유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후 김독자의 선택 속에는 항상 유중혁이 고려됩니다. 어찌보면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있어서 이 세계보다 중요합니다.

2. 전지한 독자 김독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독자는 멸살법을 다 읽은 유일한 독자입니다. 그리고 멸살법의 세계가 자신의 눈 앞에 닥쳐오죠. 독자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그에 대처할 모든 방법 역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전지(全知)하다고 할 수 있죠. 주인공 이름인 독자와 소설을 읽는 독자라는 말장난, 그리고 그의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섞여 소설의 시점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 것도 정말 위화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지하니까 그가 3인칭의 전지한 작가처럼 모든 것을 이 책을 읽고 있는 저희들에게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모든 걸 다 안다고 해서 변수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는 그가 바라는 에필로그를 보기 위해 이야기를 바꾸려는 자니까요.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바꾸어가면서 변수가 생깁니다. 전지 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고 할까요. 예를 들면 신유승 재앙을 클리어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메인 시나리오도 어찌 보면 제약조건입니다. 신유승이 메인 시나리오에서 재앙으로 출연했을 때 클리어하지 않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클리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죠. 낙원의 일도 마찬가지이고요. 메인 시나리오는 반드시 클리어해야만 하는 제약이라고 할까요. 시나리오 클리어를 위해 십악인 공필두를 영입하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존재는 이야기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은 기억으로 정의하고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정신이라고 정의한다거나 하는데,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는 인간을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혼이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야기로만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테마라는 것이 본질을 이룬다고 합니다. 유상아와 어머니가 위독한 장면은 정말 슬프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장면에서 김독자는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사람, 즉 어머니와 유상아라는 두 현실의 사람이 죽음 앞에 맞닥뜨렸을 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게 됩니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도 느낍니다. 등장인물이 아닌 같은 현실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어서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등장인물들이 아니니 두 인물의 의지가 더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더욱 독자의 예상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독자의 어미니의 테마가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테마,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사람을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독자의 어미니의 테마를 치료할 때 그녀의 테마와 관계된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연결하며 그녀를 치료하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테마라는 것은 그 사람의 핵심이지만 그 테마는 자기 혼자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 이야기와 그 인연 속에서 자신의 테마가 있다는 것은 멋지네요.

 

존재는 이야기이고 설화도 결국 이야기입니다. 강함이라는 정의 역시 설화의 강함입니다. 설화는 이야기니깐 어찌 보면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가 강함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설화가 통제되지 않으면서 멋대로 날뛰는 장면입니다. 김독자는 자신의 설화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힙니다.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관계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래서 설화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죠. 그리고 설화 역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관계해야만 한다는 것, 철학적이면서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성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좌는 성좌가 되고 난 후 자신의 설화가 닳아버립니다. 이야기는 고갈되어가고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는 곧 힘이며, 존재의 구성요소이므로 이 이야기가 닳고 고갈된다는 것은 결국 뭐랄까요 존재를 잃어간다고 해야 맞을까요? 성좌들이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탐하는 것 역시 이미 자기를 잃었기 때문이 아닌지.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럼 어찌 보면 이 이야기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클리셰적인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독자의 대표 설화는 「구원의 마왕」입니다. 그를 잘 내타내는 이 구원이라는 설화는 희생해서 구원하는 이미지인데(구원튀?!) 이 때문에 역시 클리셰 적으로 희생으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이야기는 구원을 내재하고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웹소설을 봤는데요. 정말 잘 봤습니다. 재미있는 생각도 많고 저렇게 많은 회차를 연재하는데도 "와 완결이 나오다니 대단하다"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재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니까요. 특히 개연성과 복선이 많으니 더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요피엘이 유중혁의 죄업을 측정하는 장면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죄업이다. 저렇게 밀도 깊은 죄업은,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죄업을 합쳐도 저 자가 가진 죄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뭔 놈의 3회 차가 이렇게 죄가 많데??' 이러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고 쓰지는 않았지만 코인은 개연성이라는 것도 정말 정말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종이책으로도 나와줬으면 하는데 종이책으로 발매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여하튼 재미있는 작품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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