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일상

멸망 이후의 세계 철학적 요소 with 전지적 독자 시점 본문

책 이야기/소설

멸망 이후의 세계 철학적 요소 with 전지적 독자 시점

[카페인] 2022. 2. 13. 23:12
반응형

[서론]

현재 연재 중인 웹소설 멸망 이후의 세계를 읽고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싱숑 작가님이 지은 작품으로 최근 연재되면서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감상할 때 소설 전반에 은연중에 상당 부분 철학 요소가 깔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멸망 이후의 세계는 아주 명확하게 철학적 요소들이 소설 전반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이 소설은 최근 판타지 혹은 라노벨에 유행하는 회귀물에 대한 안티테제를 주창합니다. 어느 날 각국의 모든 도시 상공에 악몽의 탑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타워 임팩트의 발생과 동시에 인류는 위기에 처합니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탑의 소환에 응해 탑을 공략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하여 타워 워커들은 탑을 공략해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탑의 77층에서 회귀의 돌이라는 아이템이 발견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멸망 이후의 세계는 모두가 과거로 회귀할 때 마지막까지 회귀하지 않고 현실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재환이라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주의: 아래는 멸망 이후의 세계와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스포일러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재환과 독자의 만남]

우선 주인공 재환은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한 번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재환은 환상수 꼭대기에 있는 태초의 악몽을 부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수는 전독시에서 독자가 가장 오래된 꿈으로 변해 0회 차 유중혁을 회귀시킨 이후 열차를 타고 꿈의 외곽지대를 경유할 때 [현재 환상수 외곽을 경유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등장합니다.

 

독자가 이 꿈의 외곽지대를 경유할 때 처음으로 다른 차원의 절대자와 조우하는데 이 사람이 멸망 이후의 세계의 주인공 재환입니다. 그리고 재환이 독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빅 브라더인가?” (전지적 독자 시점 527화) 그리고 재환이 독자에게 적의를 드러내자 독자의 설화들이 이에 대항해 이빨을 겨누는데 재환은 이 설화를 보고 “고유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유 세계는 소설에서 재환과 같은 초월자들이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해 이룩하는 개인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제4의 벽은 재환이 그가 속한 우주의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서 다닌다고 말합니다.(전독시 528화)

 

이 부분에서 잠시 보자면 재환은 독자의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보고 고유 세계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재환이 독자에게 적의를 드러낸 것은 회귀라는 속성 때문이죠. 현실을 외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각성자들은 자신만의 고유 세계를 가지고 있다. 

즉 시스템의 세계에 대항할 자신만의 세상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고유 세게였다. 3차 각성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고유 세계를 개방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방해야만'한다. 그래야만 시스템이 만든 적응계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 세계란 개인이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시스템을 벗어나 자신을 의심하고 이해하고 망아를 거쳐 창세를 실현하여 만든 것입니다. 결국은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만의 고유한 힘과 이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전독시에서 김독자가 쌓은 고유 설화와 유사합니다. 누구도 갈 수 없는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이룩한 독자만의 고유한 설화(ex 구원의 마왕)는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고유 세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멸망 이후의 세계는 전지적 독자 시점과 같은 세계관의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며, 고유 세계와 설화는 상당 부분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독시에서 존재는 이야기이며 인물의 고유성을 테마라 표현한 부분과 초월자들의 고유 세계에서 고유한 것 역시 상당히 유사성을 가집니다.

 

공통부분을 조금 더 추리자면 두 소설은 모두 현실에 판타지가 덧씌워집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포함한 인간들은 상위 존재의 노리개로 전락합니다. 즉 세상은 부조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독시에서는 스타 스트림과 성좌들이 이에 해당하고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는 재배자에 의한 재배, 빅 브라더가 이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주인공 모두 이 세상의 부조리를 깨기 위해 나아간다는 것이죠. 이러한 유사성을 보면서 소설을 감상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적 요소들]

※ 데카르트

멸망 이후의 세계는 철학적 요소들이 매우 짙게 나타납니다. 우선 첫째로 [의심]입니다. 자신의 고유 세계를 개방하기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 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의심입니다. 그리고 송과선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송과선은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자는 것입니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싹 갈아엎고 새롭게 보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존에 어떤 잘못된 생각, 편견, 판단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한 후에 새롭게 본다는 것인데 소설 속에서 재환은 [의심]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주변의 인간들은 송장으로 보이기도 하는 등 전투 때도 의심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의심의 개념은 데카르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의심은 소설 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유 세계를 개방하기 위한 첫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는 의심 – 이해 – 망아 – 창세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 시작단계가 의심이기 때문이죠. 즉 의심은 세상의 모든 것을 거두어내고 그 본질을 보려는 시도라 볼 수 있으며 이를 이해하면서 자기 확립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죠.

 

의심이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질문하는 일이었고, 이해란 세계의 존재 이유를 고뇌하는 일이었다

 

처음 혼돈에 들어온 후 검문소를 통과할 때 출입국 관리자는 재환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신분증을 보이라 합니다. 하지만 재환은 거부합니다. 의미심장한 부분은 의심을 통해 재환은 이미 스스로를 증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의 명언이죠.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내가 의심한다는 그 사실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이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고유 세계를 개방하는 데 있어, 의심은 나를 증명하는 존재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 니체 그리고 실존

멸망 이후의 세계 초월자 재환은 니체의 초인을 연상케 합니다. 초인은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말 그대로 사람을 넘어선 초인의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눈높이보다 보다 높은 곳에 존재하는 이상을 갈구하고 끝없이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으려 노력하며, 새로운 창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유 세계는 앞서 말했듯 시스템에 대항하여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의심 – 이해 – 망아 – 창세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통해 시스템을 벗어나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는 궁극적으로 창세를 열어 고유 세계를 구현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이상을 갈구하며 자신을 뛰어넘어 창세, 즉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 능력이 있는 니체의 초인과 같습니다. 소설 내에서 이러한 초월자는 심연의 신들과 동등한 능력을 지니며 대행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신을 뛰어넘기도 한다고 언급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고뇌해야만 하는 길.

자신의 고유 세계를 얻은 후에도, 그 세계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해야만 하는 길.
- 63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자기 성찰이라는 것을 거쳐야 됩니다. 이것은 재환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고유 세계를 이룩한 이후에도 니체의 초인처럼 계속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 의미를 찾고 매 순간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며 자신을 극복해나가야 됩니다. 니체의 초인과 같죠.

 

삶이 유한하기에 태어난 이유를 찾고, 살아가는 목적을 찾는다.

생이란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75화 & 76화

실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소설은 어느 날 주인공이 사는 도시에 악몽의 탑이 나타났고 부조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회귀의 돌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현재를 소중히 하지 않으며 그가 사는 세상은 어느새 그가 알던 것이 아니게 됩니다. 과거 가 그동안 느꼈던 세계와의 일체감이 사라지고 낯섦이 찾아옵니다. (악몽의 탑의 등장으로 인한 새로운 세상) 그리하여 나오는 것은 ?라는 질문입니다. [?]라는 질문, 즉 사물 혹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하는 재환과 같은 존재들은 단절로 세상을 인식하게 되며 동시에 이 세계의 존재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이 이 세게의 일부라는 사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추방됩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낯설게 느낍니다. 실존 조건을 깨달은 인간, 주인공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 즉 인간 자신이 알아왔던 주변 인물들과 사물들을 의심하게 되며, 그로 인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이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해야만 하는 것이죠. 실존 관점에서 의심이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며]

멸망 이후의 세계는 이처럼 실존주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 소설입니다. 더불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시뮬라크의 개념 역시 강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지적 독자 시점도 마찬가지인데 시뮬라크란 정말 쉽게 말하면 원본이 아니지만 원본과 같은 혹은 더 원본 같은 무엇을 말합니다. 하이퍼 리얼의 개념이죠.

 

예를 들어 전독시에 나오는 멸살법은 원본이지만 한수영이 쓴 SSSSS급 무한 회귀자는 원본 이상의 힘을 가졌었죠.(물론 작가는 같지만...) 더하여 전독시의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 에피소드]는 시뮬라크를 빗댄 에피소드입니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완전히 드러난 것은 없지만, 재환이 통과한 탑을 만든 몽마 뮬라크는 누가 봐도 시뮬라크의 어원에서 따온 것이죠. 소설이 진행될수록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추가로 적어볼 계획입니다.

 

멸망 이후의 세계는 아직 연재 중이라 결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소설 내용에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니체의 향기, 실존의 향기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보았던 점으로 볼 때 결말에 대한 한 가지 추측이 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회귀입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모든 것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영원 회귀 혹은 장소의 회귀 정도라 생각합니다.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재환은 현재를 중시하는 사람인데 왜 회귀라는 말이 나올까요? 우리의 삶이 영원한 회귀의 순환 속에 있다면 지금의 삶의 소중함보다는 허무함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인데 말이죠. 재환은 김독자를 회귀자라는 이유로 공격하였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삶에 대한 사랑은 변화를 통해 생성된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외부적 세상 혹은 조건에 매몰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실존적 의미를 묻는, 지금의 현실을 매 순간 긍정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 나가며 곧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길 바랄 만큼 말이죠. 고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결말에서처럼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되고 반복되며 그 순간에서도 그들이 삶을 사랑하듯 회귀와 함께 삶을 긍정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회귀적 결말 예측으로는 시작점 그 장소로의 회귀입니다. 즉 재환이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악몽의 탑이 처음 나타난 자신이 본래 있던 장소로의 회귀이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이란 그 자체로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사실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부조리한 세상이 사라져야 됩니다. 재환이 부조리한 세상을 멸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시작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중략)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하지만 세계 자체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 역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고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죠. 알베르 카뮈 식으로 말하면 반항하는 인간입니다. 부조리를 마주할 때 그것에 반항하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자유롭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의 시작, 악몽의 탑이 있던 곳에서 반항하는 인간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로 흥미로운 웹소설 멸망 이후의 세계.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기대하며 보고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