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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삶과 깨달음의 기록: 우리 모두의 부활을 위해...>

 

호리 다쓰오의 <바람 불다>를 처음 읽은 건 아마 작년 3월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몇 번이고 읽었는지 모른다. 특히 릴케의 레퀴엠의 마지막 구절....
내가 읽은 지 1년이 더 지난 지금에서야 이렇게 리뷰를 쓰는 것은 처음 읽었던 그 당시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던 그 이미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손에 잡힐 듯한 이미지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쓰오의 <바람 불다>의 줄거리는 단순하게 요약할 수 있다. 실제 자신의 일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자신의 약혼녀 아야노가 병으로 인한 죽음을 소재로 다루는 내용이다. 즉 병으로 죽어가는 약혼녀를 옆에서 보살피면서 그리고 그 약혼녀의 죽음에 대한 체험, 인생에 대한 깨달음에 대해서 쓴 소설이다.

 

<바람 불다>에서 주인공이 약혼녀인 아야코를 잃어가는 과정은 어떠한 책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 죄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 그 자체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가 율법 및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 율법은 욕망의 자동적 삶, 반복의 자동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요구된다. 왜냐하면 율법만이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주체의 `의지'가 무엇이든 욕망을 대상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주체를 죽음이라는 육체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욕망의 이러한 대상적 자동성이다.

 

    분명히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무의식 문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에 의해서 고정되고 해방되는 욕망의 삶은 주체라는 중심축으로부터 이탈해 무의식적인 자동성으로 완성된다. 그것과 관련해 의지적이지 않은 주체는 죽음을 생각해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 中-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주체적 욕망, 즉 아야노를 보낼 수 없다는 욕망을 체념 혹은 절망으로 대상에 묶어둠으로써, 자신의 주체적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대상에 고정시켜 버린다. 즉 앞의 구절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욕망의 대상적 자동성은 의지적이지 않은 인간의 경우 주체의 중심축으로부터 이탈해 죽음을 생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몸의 죽음이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주체적 인정의 상실, 곧 주체의 죽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기서 아야노를 보낼 수 없다는 주인공의 간절한 소망을 죄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던 아야노의 죽음의 과정의 체험은 어느 알 수 없는 기대와 희망에서  그리고 점차 죽음이 현실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절망으로 바뀌어 간다. 아야노를 잃고 그는 「죽음의 계곡」이라는 곳에서 생활한다.

 

무미건조한 생활의 연속에서 즉 죽음의 삶에서 주인공은 무심코 찾아간 교회에서 신부에게 어떠한 한마디를 듣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은 오늘 같이 바람이 강하고 추운 날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릴케의 「레퀴엠」은 결정적으로 그를 구원한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사도 바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에 의해 조정되는 삶/죽음의 교착의 형상은 삶과 죽음에 관련된 준엄한 작용에 의해서만 대체될 수, 다시 말해 다시 한번 뒤바뀔 수 있는데, 그러한 작용이 바로 부활이다. 오직 부활만이 삶과 죽음을 본연의 위치로 되돌려 보낸다. 삶이 반드시 죽음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즉 구원이라는 것은 부활이다. 부활만이 죽어버린 주체를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 삶의 죽음이 바로 자아이며, 죽음의 삶이 바로 죄의 삶이다. 아야노를 보낼 수 없다는 욕망의 삶 그리고 아야노를 보낼 수 없다는 것에 예속되어있는 주인공의 삶은 죽음의 삶이고 이것이 바로 죄의 삶이다. 

 

작가는 <사도 바울>의 구절처럼 부활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한다.

 

죽음의 계곡을 덮을 것처럼 눈 위에 반사되는 불빛이 자신의 산장에서 나오는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마주 본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자신이 명명한 죽음의 계곡이 아닌 정겨움을 가져다주는 장소임을 깨달았을 때 그곳은 숨겨져 있던 원래의 이름인 행복의 계곡」으로 탈바꿈한다. 죽음의 계곡이 행복의 계곡으로, 죽음이 부활로 인해 삶이 되는 순간이다.

 

소설에서 약혼녀인 아야노가 죽은 건 12월 달이며,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은 날은 그로부터 조금 후인 12월 24일이다. 12월은 한 해의 끝이며, 겨울이고 겨울은 모든 것의 죽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12월 24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계절인 동시에 성탄절 이브이며 이 날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날이다.

 

<바람 불다>는 아야노의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주체의 죽음과 함께 살아가며 또 한 그것을 극복한 삶을 그린 소설이지만  이는 비단 주체의 죽음을 경험한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에 묶여 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부활을 통해 우리들이 진정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모든 것의 긍정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모든 것의 긍정과 희망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람 불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레퀴엠』의 한 구절을 남긴다.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만일 견딜 수만 있다면, 죽은 이들 사이에 그대로 머물라.
   죽은 이들에게도 할 일은 많은 터.
   하지만 나를 도와는 다오.
   너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다면                                             
   어쩌다 멀리 있는 사람이 나를 도와주듯 - 내 안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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