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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 카프카의 다리로 읽는 변신]

 


거의 10년 만입니다.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게. 요즘 이런저런 장르 가리지 않고 읽고 있는데, 문득 아무 이유 없이 카프카 생각이 나 카프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카프카는 제가 한창 책을 읽을 때 가장 자주 읽는 작가였는데 몽환의 숲에 갇혀 있는 느낌, 미로를 헤매는 그 느낌이 정말 너무도 좋았습니다.


사실 카프카라고 하면 변신이 가장 유명하지만 저는 중·장 편 소설보다는 단편을 더 좋아했습니다. 단편을 읽다 보면 전율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카프카의 진정한 묘미는 단편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법 앞에서, 다리, 작은 우화, 묵은 책장 등등

카프카의 작품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다리입니다. 이 짧은 한 편의 단편은 뭐랄까 제가 느끼기에는 카프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같습니다. 몇 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구조와 은유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래서 카프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변신과 다리를 함께 써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리는 변신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만, 어찌 보면 난해하고 미로에 갇힌 느낌이 듭니다. 그때 다리라는 이 짧은 단편을 먼저 읽는다면 변신을 조금 더 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리는 다음의 첫 문장과 함께 시작합니다.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 어느 심연 위에 나는 있었다. 이 편에는 두 발끝이, 저편에는 두 손이 뚫고 들어가 있어, 부스러 떨어지는 진흙을 나는 단단히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간결하면서도 너무나도 많은 느낌을 주는 명문입니다. 하나씩 봐 볼까요. 일단 나는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엎드려뻗쳐 있는 모양이네요. 부스러 떨어지는 진흙을 단단히 붙들고... 위태해 보입니다. 여기서 추락의 이미지가 각인됩니다. 즉 안간힘을 다하여 엎드려뻗쳐 있으며 심연 위에서 위태롭게 다리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뻣뻣하고 차가웠습니다. 뻣뻣하고 차가운 죽음의 이미지까지 함께 연결됩니다. 게다가... 문장이 전부 과거형입니다. 왜 과거형일까요. 그럼 지금은?이라고 반문해봅니다.

 

위태롭고 불안한 추락의 이미지와 차가운 죽음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저 첫 문장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래는 심연입니다. 저 첫 줄을 읽으면 끝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이유가 없는데 심연 위에서 다리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으며 굉장히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여기서 삐끗하면 심연으로 떨어져 죽을 각이 보입니다. 조금만 더 뒤로 가봅시다.

 

그때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로 오는, 나에게로 오는 발소리.
몸을 쭉 펴라, 다리여, 당당한 태세를 취하라, 난간 없는 들보여, 너에게 몸을 맡기는 이를 받쳐주라.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긴장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당한 태세로 최선을 다해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가 두 발로 내 몸 한가운데서 뛰어올랐다. 나는 뭐가뭔지 모르면서도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중락)


다리가 몸을 틀다니! 미처 몸을 다 틀기도 전에 나는 벌써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산산이 찢기고 찔려 있었다, 격류 속에서 항시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응시했던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들에.

 

마지막이 정말 압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서 나는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굉장한 고통을 줍니다. 생각해봅시다. 내가 다리라면,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인간입니다. 다리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는 인간입니다. 고통과 함께 의문이 듭니다. 지금 나에게 이 고통을 주는 것은 누구인가? 고통과 함께 정신을 번쩍 차리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즉 다리가 몸을 트는 순간 추락하고 있었고 추락하였고 찢기고 찔렸습니다. 

 

주인공을 몸을 트는 순간 말합니다.  "다리가 몸을 틀다니!". 주인공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리가 몸을 틀면 안 된다는 것을. 다리인 이상 그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역할을 위반하는 것은 금기라는 걸 말이죠.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강요받는 역할을 위반하는 행위는 것은 금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몸을 다 틀기도 전에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죽음의 이미지가 형상화됩니다. 추락하고 있었고 추락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산산이 찢겨버립니다. 그리고 찔려있었습니다. 결국 다리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순간, 즉 다리 역할 위반의 순간 추락과 동시에 찢겼습니다. 그리고 찔립니다. 순서를 보면 추락과 동시에 몸이 찢기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찔려버리죠. 결국 내가 어떠한 외부 충격으로 다리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순간 추락과 동시에 찢겨 죽습니다. 찔리는 건 나중 일입니다. 

 

이 단편을 보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이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나 의문이 없습니다. 그저 시작부터 다리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뻣뻣한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떠한 강요받는 삶을 살고 있다고. 주인공이 다리임을 강요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얼마나 깊은지 모를 심연이 있고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가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강요받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심연과 삐죽한 돌이 우리를 위협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공포와 함께 강요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삶에는 강요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부조리합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강요받는 삶을 위반하는 그 순간 추락과 동시에 산산이 찢겨버린 다는 것입니다. 저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에 찔리기 전에 말이죠. 결국 끝을 보면 소설 첫 부분이 과거형인 이유가 나왔습니다. 주인공은 찢기고 찔려버려서 결국 죽음으로 향하였으니 다리였던 것은 과거가 맞으며 정말 첫 문장에서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던 결말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변신의 그레고르의 삶을 한 번 봐봅시다.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리의 주인공이 다리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처럼 그레고르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벌레의 역할을 강요받고 시작합니다.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을 뒤흔들 정도로 정말 큰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이때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에 멘탈이 나가기보다는 자명종 시계를 보고 6시 반이라는 데 멘탈이 나가고 제때 출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직장에서 잘릴까 봐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지금 제때 출근하지 못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더 고민합니다. 강요받는 삶입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다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다리의 주인공은 시작하자마자 다리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위태위태하지만 그래도 다리의 역할을 수행해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변신에서는 그걸 못하게 강요받고 있습니다. 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 외판사원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강요받고 있습니다. 벌레임을 강요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리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명확히 보입니다. 한쪽은 역할을 강요받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강요받는다는 점은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다리의 딱딱한 이미지와 소설 속의 그레고르의 갑충의 딱딱한 이미지는 또 공통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비인간적인 모습 역시 그렇습니다. 다리의 역할(외판원)을 수행할 수 없는 그레고르는 인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징그러운 벌레의 이미지라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팔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버리고 싶지도 않은 많은 물건들이 남아돌았다. 이 모든 것들이 그레고르의 방으로 떠돌아왔다. 부엌에서 재 담는 통과 쓰레기통까지도.

(중략)

처음에는 기어 다닐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그랬으나 나중에는 점점 재미가 났기 때문에 그랬다.

(중략)

왜냐하면 그의 방은 온통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사방으로 날리는 먼지가 가득하여 그 역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실오라기, 머리카락, 음식찌꺼기를 등과 옆구리에 질질 끌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 카프카 변신-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은 다리는 위반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그 대가가 돌아오는 반면 변신의 경우는 천천히 다가옵니다.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점점 가족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방에서 자신의 물품들은 정리됩니다. 어찌 보면 인간성이 정리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자신의 방이 정리될 때 액자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은 어찌 보면 마지막 인간성을 남겨달라고 투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후에 그의 방은 거의 쓰레기 창고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기어 다닐 자리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단절과 함께 본인의 공간은 자신의 방으로 제한되며 그리고 그 방조차 기어 다녀야 할 정도로 본인의 공간이 좁아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방에서 먼지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정말 벌레의 공간 같은 이미지로 변합니다.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중략)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힘없이 떨어졌고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카프카 변신-

 

그리하여 그레고르는 그의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가지고 사랑으로 식구를 회상하고며 마지막 숨과 함께 생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서도 주목할만한 점은 머리가 먼저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다리에서 주인공이 찢기고 찔렸듯이 그레고르 역시 머리가 떨어지고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옵니다. 정말 묘하고 소름 돋습니다. 

 

만약 그레고르가 인간성 없는 완전한 한 마리의 벌레가 되었더라면,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올 때 그의 지독한 고독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끝까지 인간성을 유지한 채로 그레고르의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오는 부분은 그의 짙은 고독감이 저의 온몸에 내려앉는 느낌입니다...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올 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 소통도 하지 못했습니다. 단절된 소통.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아아, 생의 앞에 놓인 것은 강요받는 삶과 그로 인해 좁아지는 세계, 그리고 고독과 허무로 점철 지어진 죽음의 길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렇게도 생각해 볼까요. 예를 들어 회사원이라면 하루에도 수없이 강요받는 삶과 그의 역할에 파묻혀 자신을 잃고 우울하기도 하고 직장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회사를 퇴직하거나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해서 자신의 자리, 혹은 자신의 역할이 없어질 때, 즉 변신의 그레고르와 같이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될 때 절망하는 사람들 역시 많습니다. 지금의 취준생의 경우는 또 어떨까요. 취업을 해야 하는데, 카프카의 소설 다리에서 다리의 역할이 그렇게나 하고 싶은데 그 기회조차 없는 것은 정말 우울하고 절망감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인생이란 진퇴양난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카프카의 소설이 더 와 닿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카프카는 돌연한 출발」이나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같은 단편을 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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