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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문학

카프카에 대하여

[카페인] 2012. 3. 22.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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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에 대하여]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몽환의 숲에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마치 미로에 갇힌 것 같이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 몽상가는 고작 몇 줄 되지도 않는 글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카프카의 소설은 언뜻 보기에는 난해하다. 책을 읽으면 몽환의 숲에 있는 느낌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미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 그러나 몽환적 느낌과 함께 미로 속에서 그 길을 헤매게 만드는 것이 카프카의 탁월한 능력이다.

우선 카프카의 소설은 소설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허무의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카프카의 본질이며 이 본질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카프카 작품의 핵심이다.

 

[강요받는 삶 그리고 죽음]

복잡한 미로 속에 있는 느낌. 이것이 처음 카프카의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이다. 카프카는 절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돌려 말한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다. 정신줄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키워드들이 이 일련의 흐름을 말해준다.

우선 카프카의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강요받는 삶이다. 카프카의 희대의 명작인 『다리』를 보면 주인공은 다리(bridge) 임을 강요받는다. 『다리』에서 주인공은 다리가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리(사물화)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이다. 주인공은 다리의 역할을 강요받고 있고 이를 묵묵히 수행한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주인공이 스스로 다리로서의 역할을 위반함으로써 주인공은 추락한다. 그리고 죽는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다리가 몸을 틀다니! 미쳐 몸을 다 틀기도 전에 나는 벌써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산산이 찢기고 찔려 있었다. 격류 속에서 항시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응시했던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들에.』

- 카프카 다리-

 

위의 구절이 『다리』의 마지막 구절이다. 위의 구절에서 '나'가 다리의 역할을 위반함으로써 추락하는데 특이한 점은 그 죽음의 과정이다. 내가 다리로서의 역할을 위반하면 추락하여 삐죽삐죽 솟은 돌맹이들에 찔리는 건 그냥 그런 구조라 치자.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추락하는데 산산이 찢기고 찔려있었다는 구절이다. 상상해보라. 떨어지면 찔린다. 그것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찢겼을까? 그리고 찢기는 것이 찔리는 것보다 우선한다. 즉 내가 다리로서의 역할을 위반하면 그 무조건적인 결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다리임을 그만둠으로써 찔려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리의 역할을 위반한 순간 산산이 찢겨 죽는 것이다. 즉, 위반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변신』 역시 주인공은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레고르는 벌레로서의 삶을 강요당한다. 앞서 『다리』와의 차이점이 있다.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이다. 다리는 주인공이 물체임을 강요당하고, 변신에서는 주인공이 생명체임을 강요당한다. 말하자면 『변신』에서 주인공은 소설 『다리』에 나오는 주인공이 다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강요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말 안 해도 뻔하다. 죽음이다. 왜냐하면 변신에서는 소설 다리에서 말하는 위반의 삶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필연적인 죽음일 수밖에 없다.

 
 

[존재의 나약함, 허무 그리고 도피]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약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의 존재란 것은 땅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거목 같은 존재여야만 한다. 이것은 당위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요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단단히 뿌리내린 거목과 같이 보일지 모르나, 실은 인간의 주체적 삶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밀면 쓰러질 것 같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없는가?
 
없다. 카프카에게 구원은 없다. 
 
구원이란 금기이다. 그리고 허무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카프카의『법(法) 앞에』서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은 법으로 들어가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문지기는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다. 지금 법으로 들어가는 것은 금기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법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죽기 직전 문지기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람이 법을 얻고자 노력한진대』 하고 그 시골사람이 말한다. 『이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문지기는 이 사람이 임종에 임박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그의 스러져가는 청각에 닿게끔 고함질러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카프카 법(法) 앞에서-


그렇다. 그 구원의 길(法)은 다른 누구를 위한 길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길이었다. 내가 나의 구원의 길로 가는 데 문지기가 막고 있다. 나는 나의 구원의 길조차 나의 의지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일생을 바친 기다림과 노력 끝은 허무이다. 즉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란, 금기이며 그것을 일생을 다해 추구해 봤자 남는 것은 죽음, 허무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우리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바로 도피이다.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옆 마을일지라도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라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프카에게 있어서 이곳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좌우로 멀리에서 벽이 보여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양쪽에서 좁혀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 『너는 방향만 바꾸면 돼』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었다.

카프카 - 작은 우화
 
 
이 죽음의 길 위에 있지 않기 위해, 카프카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인디언이 되길 소망한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단단히 뿌리내리고 확장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목과 같다면 그것은 필연적이다. 허나 현실이라는 굴레에 강요당하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점점 좁아져 들어가는, 죽음과도 같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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