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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줄거리 및 해석]

너무나도 유명한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은 세계 문학에서 오래도록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명작입니다. 무미건조한 문체에 상당히 난해해 보이는 이 소설은 큰 줄기의 텍스트를 잘 이해한다면 삶에서 많은 부분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여, 나름의 해석을 통해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줄거리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짚어볼까 합니다.

 

 

위가 그 유명한 이 방인의 첫 문단입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은 굉장히 명문으로 알려져 있죠. 위와 같이 이방인은 어머니의 별세로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마랑고로 떠납니다. 자신이 살던 알제라는 곳에서 말이죠.

 

이방인은 말 그대로 외부 사람입니다. 특히 카뮈는 이러한 이방인의 감정을 소설 곳곳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방인의 첫 문단을 봐봅시다.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우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 극단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뫼르소는 ‘어쩌면’이라는 굉장히 인식이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나에게 온 전보 내용입니다.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경우 이에 대한 일과 절차는 내가 주체가 되어 해결해야 될 일입니다. 하지만 ‘내일 장례식’이라며 말 그대로 통보가 왔습니다. 이는 굉장히 부조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죠. 당사자인 뫼르소에게 무엇을 논의한다거나 하는 절차 없이 그냥 통보가 온 것으로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고로 이 첫 문단은 소설 전반을 함축하는 굉장한 명문입니다. '어쩌면'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뫼르소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행사를 통보받고 이방인으로서 마랑고에 위치한 양로원이라는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랑고에서 그곳의 절차를 따르며 어머니를 보내는 과정을 겪는데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은 첫 문단이 명문인 것은 이 한 문단에서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또 말할 것인지를 함축적으로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눈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주름 투성이 가운데 희미한 빛만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방인-

 

 

장소와 배경을 봅시다. 양로원은 노인들이 생의 끝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별세로 나타나죠. 동시에 위의 문장과 같이 서글픈 휴식시간, 침묵, 검은색, 주름 등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들 자신은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뫼르소는 밤샘을 하던 중 노인들이 제각기 소리를 내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소리입니다. 왜 나는 이것을 의식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 뫼르소는 외부인, 즉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마랑고라는 공간에서는 알제와 같은 편안함과 세상과의 일체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는 뜨거운 태양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마랑고에서 이방인적 의식을 강하게 느끼던 뫼르소는 어머니의 의식이 끝난 후 본래 자신이 살고 있는 알제로 다시 돌아오며 안도감을 내쉽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의미에 대해 해석해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숲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숲과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숲 안에 있었다면 결코 숲이라는 큰 그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멀어져 있는 것, 즉 단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방인이 되는 조건이며 의미입니다. 소설에서 숲 안은 알제이고 숲 밖은 마랑고입니다. 그리하여 느끼는 감정은 낯설음입니다.

 

노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는 마랑고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들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알제에 살고 있는, 이방인인 뫼르소였기 때문에 그 소리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에게 그 소리는 낯선 소리인 것입니다. 즉 인식의 속성은 쉽게 말해 단절임과 동시에 낯설음입니다.

 

마랑고에서의 뫼르소가 느끼는 감정은 알제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일체감을 느끼는 세상, 자신의 이 세계의 일부라 하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확신이 무너져내리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결국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리고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낯섦을 느끼는 이방인이 되는 것이죠.

 

산뜻하게 느껴왔던 태양에게 낯선 모습, 즉 뜨거움과 압박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는 그동안 뫼르소가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 그리고 세상의 다른 측면입니다. 그렇기에 마랑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말하죠. 그리고 이 태양 때문에 끝내 아랍인을 쏘게 됩니다.

 

이방인에서 태양의 의미는 하나의 세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본질적인 세계인 것이죠. 일체감, 통일성이 느껴지는 상태에서는 세계에서 태양은 기분 좋고 온화한 따스함입니다.

 

반면 단절과 낯섦을 인식한 세계에서 태양은 적의를 가진 뜨거운 압박인 것입니다. 뫼르소를 압박하는 태양은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비롯한 이 세계의 속성은 무관심입니다. 이러한 온화함과 동시에 반대되는 적의와 무관심의 이러한 아연한 상태가 부조리입니다.

 

다음날 주인공은 수영장에서 만난 전 동료 마리와 만나 연애를 하고 같은 아파트의 레이몽과 친해지게 됩니다. 레이몽은 세간에서는 평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죠. 그는 아랍인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녀가 그를 속이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복수를 하는데 주인공은 그를 돕는 편지를 써주기도 하죠.

 

어느 날 뫼르소와 마리는 레이몽의 친구 마송의 초대로 그의 별장으로 놀러 갑니다. 그곳에서 그들을 따라온 것은 레이몽의 전 여자 친구의 오빠와 그 일행들이었고 이들은 그곳에서 다툼을 벌이고 레이몽은 부상을 입죠.

 

나는 바위 뒤의 서늘한 샘을 생각했다.

그곳에서 그늘과 휴식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다툼 직후 뫼르소는 해변을 배회하는데 쏟아붓는 햇빛에 괴로워합니다. 태양으로 인해 온 세상이 그를 압박하기 시작하죠. 그리하여 그늘과 휴식을 위해 서늘한 샘을 찾던 중 그 아랍인과 다시 만나는데 뜨거운 태양의 압박에 못 이겨 그를 쏩니다.

 

 

이렇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1부가 마무리되는 데 이 일로 뫼르소는 잡혀감으로써 재판을 받게 됩니다. 우선 그전에 아랍인 사건을 잠시 봐봅시다. 태양 때문에 쏘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태양은 어머니 장례 때와 똑같은 태양이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세상은 정지 상태에 머문다는 표현이 있으며 또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랍인을 해한 것은 세상의 적의로 인한 압박과 정지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중요한데 세상은 여전히 무관심하게 침묵하고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뫼르소는 그 침묵을 스스로 깨버린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인공의 세계와 일체감이 깨어지고 느끼는 그 갈등이 현실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와의 갈등, 그리고 세계의 적의가 현실 그리고 사회로 치환되어 주인공에 대한 적의로 연결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2부에서 사회가 주인공에게 적의를 내비치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일체감이 깨어진 것은 뫼르소가 사회와의 일체감 역시 잃어버리는 것으로 연결되며, 태양이 보여주었던 적의처럼 사회 역시 그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2부에서 등장하는 재판입니다. 

 

2부로 넘어가 아랍인을 해한 것으로 뫼르소는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의 일은 내내 뫼르소를 사회의 적으로 재단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은 앞의 '세계'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태양을 포함한 세계는 자연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에는 어떠한 목적의식 같은 것 없습니다. 그저 자연히 존재하는 것이죠. 

 

반대로 사회는 그들의 기준으로 뫼르소를 재단하는데, 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바로 판관과 사제입니다. 판관은 사회의 관습, 규범 등의 기준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해 뫼르소를 생의 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뫼르소에게 속죄와 구원을 강요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죠.

 

그리하여 주인공은 생의 끝으로 인도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이는 뫼르소가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죽음의 존재가 주인공을 다시 생으로 인도합니다. 인간의 눈앞에는, 혹은 그 끝에는 항상 죽음이 있다는 것은 부조리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유일한 진리입니다.

 

사람은 시시각각 생의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평소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부조리를 인식한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뫼르소와 그의 어머니처럼 말이죠.

 

그리하여 생의 끝을 인식한다는 것은 눈앞에 죽음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이를 등 뒤에 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생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가야 될 진정한 생입니다.

 

양로원에서 어머니는 황혼기에 약혼자를 두었습니다. 왜일까요? 생의 끝을 인식하고 이를 등지고 바라보는 길은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약혼자를 두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생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생의 끝을 인식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또한 세상, 세계와의 화해입니다. 적의를 가지고 나를 압박하는 세계에게 화해를 구하고 세계와의 통일성, 일체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결국 우리가 생의 길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래 우리 존재는 세계와의 일체감을 느꼈을 때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설의 마지막을 보면 세계의 무관심을 다정스럽다고 표현하며 동시에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세계의 본질) 그리고 형제라 칭하며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표현합니다. 정말 소음 돋을 정도의 마지막 문장이죠.

 

대략 여기까지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줄거리와 기본적인 나름의 해석이었는데 사실 이것도 굉장히 축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 정말로 깊고 밀도 있는 소설임과 동시에 정말 현미경처럼 어느 한 단어와 문장조차 의미 없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 심도 있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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