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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온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조선의 왕 숙종 시대의 가계도를 포함해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대한 이야기들이 <순종실록><인현왕후전>이라는 역사서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을 바탕으로 숙종 가계도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사에 대해 조금 요약해보려 합니다.

 

위가 숙종 가계도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흐름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입니다. 붕당에서 이들은 서인과 남인을 투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글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두었습니다. 첫 번째 파트는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으로 대표되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이며, 두 번째 파트는 인원왕후부터 영빈 김씨의 이야기입니다.

 

[숙종 가계도 –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숙종의 아버지는 조선의 왕 현종이고, 어머니는 명성왕후였습니다. (명성황후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숙종의 할아버지는 효종인데 꿈에서 용을 보았다고 기뻐하며 장차 원손(元孫)을 얻을 길조라 생각해 이름을 용상이라 지어놓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흠잡을 곳 없는 정통성을 가진 숙종은 일곱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가례(嘉禮: 왕실 가족의 혼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이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인물은 김만기의 딸 광산 김씨로 훗날 인경왕후입니다.

 

김씨는 대대로 명문거족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 김장생은 조선 후기 예학의 대가로 송시열과 송준길의 스승이었으며,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은 인경왕후의 작은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숙종이 14세 되던 해에 아버지 현종이 승하하고 어린 나이에 조선의 19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인경왕후는 열아홉 되던 해 공주를 낳았으나 이튿날 세상을 떠나고 두 번째 아이 역시 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인경왕후 본인 역시 병으로 1680년 스무 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참고로 인경왕후에서 인경(仁敬)은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하였으며 자나 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입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인경왕후 승하 후 전 왕비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한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대비는 왕비의 간택을 서두르는데 이는 궁인 장씨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장희빈으로 불리는 이 여인의 이름은 장옥정. 그리고 간택된 사람은 인현왕후입니다.

 

명성왕후는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에 장희빈이 승은을 입을 것을 알고 그녀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대비가 그녀를 내쫓은 것은 당시 서인과 남인으로 대립된 정국에서 명성왕후와 인경왕후, 인현왕후 집안은 서인 측이었고, 장희빈은 남인 측에서 정치적으로 입궁시킨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둘러 왕비를 간택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인현왕후는 1681년 15세의 나이로 왕비로 간택되는데 당시 숙종의 나이는 21세 였습니다.

 

이후 명성왕후는 1683년 42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그녀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유일하게 왕세자빈, 왕비, 왕대비의 신분을 거쳤던 인물이었습니다. 명성왕후의 승하로 이때부터 인현왕후의 앞날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명성왕후의 친정과 인현왕후의 친정은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서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현왕후에게는 명성왕후가 자상한 시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든든한 버팀목이었는데 그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그리고 서인 또한 명성왕후의 승하로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장희빈에 대한 총애

숙종은 어머니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 장희빈과 헤어지게 되었었는데 명성왕후 승하 후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렇게 인현왕후는 서인, 장희빈은 남인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서인과 남인의 운명도 함께하게 됩니다.

 

장희빈이 궁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다시 숙종의 애정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더욱 교만해져 갔으나 왕의 마음을 돌이킬 대안이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원자를 얻지 못해 서인 측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후궁을 간택하라 적극 권하는데, 이는 장희빈이 득세할 것을 두려워한 서인 측의 의도와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영빈 김씨가 후궁으로 간택됩니다.

 

하지만 후궁을 간택하고도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궁인이었던 그녀에게 종4품 숙원이라는 정식 직책을 내립니다. 이는 관례에 어긋나는 처사였던 것으로 이처럼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사랑은 점점 과해집니다.

 

그리고 1688년 장희빈에게서 왕자가 탄생하게 되고 숙종은 서인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는 정1품 희빈에 봉하면서 장희빈이 되고 그녀의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할아버지인 장응인은 우의정의 벼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서인은 몰락의 길을 걷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간택 후궁인 김씨 역시 폐출되었습니다.

 

인현왕후 폐위

장희빈은 왕후가 원자를 해하려 한다, 희빈을 저주하려 한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내고 숙종이 이를 보고 듣게 해 인현왕후를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왕후를 폐위하는 경악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폐위를 반대했던 이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립니다. 그리고 희빈은 왕비로 봉해집니다.

 

폐비된 인현왕후는 본가로 돌아오고 친정이 몰락하게 된 것은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사람도 일절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숙종이 1689년 장씨를 왕비로 삼기 위해 인현왕후를 내쫓고 서인 측의 여러 인재를 해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뀌었던 사건을 기사사화 혹은 기사환국이라 부릅니다.

 

인현왕후 복위

<인현왕후전>에 장희빈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는데, 숙종은 또 다른 여인을 사랑하여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후일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입니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내쫓은 반성 때문인지 혹은 남인의 세력이 너무 강해진 것에 대한 견제인지 남인 주요 인사들을 유배 혹은 파직하고 서인들 다시 등용함으로써 정국은 다시 서인이 주도하게 됩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합니다.

 

그리고 <숙종실록>에서 왕후를 폐위한 잘못을 뉘우치며 그가 인현왕후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여려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를 통해 인현왕후의 입궁이 확정됩니다. 그리고 궁궐로 돌아온 인현왕후는 세자와 신하들의 문안을 받으며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국모가 된 것이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작호 역시 복원되어 그동안의 불효를 씻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인현왕후를 복원하려면 장희빈을 폐해야 되었는데 그러한 절차 없이 복위를 단행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인현왕후의 복원으로 장희빈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게다가 중전에서 빈으로 강등되죠.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이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예도 제대로 행하지 않다고 전해집니다.

 

인현왕후의 승하와 장희빈의 악행

궁에 돌아온 후 인현왕후는 몇 년 후 병으로 승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가 35세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이죠. 그리고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저주 사건을 주도한 자들을 살려둘 수 없다 하여 주도자들을 참형에 처하고 장희빈은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숙종은 장희빈 사건을 겪으며 이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괴로워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후궁이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현왕후 행록을 짓어 그녀의 인품과 후덕을 회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에서 못다 한 정을 다음 생에서 영원토록 함께할 수 있도록 함께 묻어달라 하였다 전해집니다.

 

[숙종 가계도 – 인원왕후부터 영빈 김씨까지]

1) 인원왕후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인원왕후 김씨는 숙종보다 무려 26살 아래입니다. 인현왕후가 승하한 후 숙종 본인이 간택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고 하며, 본관은 경주로 아버지 김주신은 명관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숙종 별세하기까지 정성을 다해 그를 돌보았고 승하 후에도 숙종의 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집니다. 영조실록에는 “성품이 본래 단정하고 엄숙하며 정숙하고 전일(專一)하며 조용하고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숙종 승하 후 경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고 경종 승하 후 영조가 21대 왕으로 등극하자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영조는 인원왕후를 지성으로 섬겼다고 전해지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숙종 사이에서 후사는 없었습니다.

 

2)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숙종 가계도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24세인 1693년 종4품 숙원 품계를 받고 첫아들 영수 세상에 가졌으나, 영수는 태어난 지 석 달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영조가 태어나고 종1품 귀인이 되었으며, 장희빈의 저주 사건을 알려 인현왕후의 한을 풀어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숙종 승하 후 희빈의 아들은 소론을 배경으로 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은 노론을 배경으로 하여 왕권경쟁을 했었는데 장희빈의 아들이 승리하여 경종이 되었으나 혈통의 단절로 인해 후에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왕이 됩니다. 영조는 조선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좌에 있었으며, 영조 승하 후 손자인 정조가 왕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3) 명인 박씨

궁인 출신으로 입궁 후 승은일 입은 후 오래도록 총애를 받았으나 후사가 없어 작위를 받지 못하다가 연령군이 생긴 이후 후궁으로 봉작되었습니다. 인현왕후의 왕비 책봉을 기념하여 종1품 귀인에서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습니다.

 

4) 영빈 김씨

본관은 안동으로 숙종보다 8살 아래입니다. 대대로 명문 집안으로, 간택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간택 후궁은 사대부 출신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입궁한 후궁으로 후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입궁하는 후궁을 뜻합니다.

 

숙종이 남인 측의 비호로 입궁한 장희빈을 사랑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 측에서 숙종의 후사를 위해 입궁하게 한 여인입니다.

 

입궁 후 2년 넘도록 후사가 없었던 반면 장희빈은 후사를 가지는 바람에 장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어버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폐출되어 본가로 돌아갑니다. 인현왕후 복위 때 억울함이 풀려 작호를 회복하고 다시 입궁하게 되었으며 인현왕후 승하 후 영빈으로 승격됩니다.

 

명문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의 후궁이 되어 여러 번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생을 화려한 궁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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