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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앞에서 - 구원은 있는가]

 

 


카프카의 변신과 다리에 관한 글을 쓰다가 다른 단편이라도 조금 더 연결 지어서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연속해서 카프카의 중단편에 대해서 시리즈처럼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큰 틀만 간략하게 써볼까 합니다. 다리와 변신에서 결국 강요받는 삶과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강요받는 삶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났다면 그럼 탈출구는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법(法) 앞에서」라는 소설이 그에 대한 카프카의 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는 「법 앞에서」라는 소설은 굉장히 난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처음 읽으면 "이게 뭐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 저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간결한 글은 난해한 만큼 매력 있으며, 더하여 정말로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단편입니다. 다양한 생각의 가능성, 이것이 카프카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카프카의 단편 중에서 다리, 작은 우화와 함께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글입니다.

 

다음은 법 앞에서의 처음과 끝 부분입니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 사람 하나가 와서 문지기에게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략)

「그렇지만 지금은 안되오」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려 있고, 

- 법(法) 앞에서 시작 부분 -

 

「이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문지기는 이 사람이 임종에 임박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그의 스러져가는 청각에 닿게끔 고함질러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 법(法) 앞에서 마지막 부분 -


한 시골 사람이 법(法)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시골 사람이 와서 법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는데... 문지기는 허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의 '법 앞에서'의 줄거리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입니다. 문지기는 끝까지 이 사람이 법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사실 이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법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렸지만 결국 주인공은 법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림과 함께 늙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문은 닫혀버립니다.  

역시 카프카의 단편답게 첫 문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지막을 읽고 다시 돌아가 첫 문장을 읽으면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문지기라는 것은 외부의 적이 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왜 오직 나만을 위한 법의 길을 막아서는 걸까요? 문지기가 막아야 했던 것은 이 길의 주인인 내가 아니라 이 길의 침입자였어야 했는데 말이죠.  게다가 문은 열려 있습니다.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려 있고,

 

문이 항상 열려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이것은 법의 속성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인간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법은 만인의 평등과 같은 인간의 권리를 보장합니다. 그러니 닫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죠.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법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문은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문지기가 법을 구하러 온 사람을 막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막을 필요성이 있을까요? 누구나 법을 구하러 자유롭게 드나들면 될 것입니다. 문지기가 지키고 있을 이유는 사실 없는 것입니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따라서 저 첫 문장은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이 잘못된 상황임을 단 한 줄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법 앞에 문지기가 있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상황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나만을 위한 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시골 사람은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닌 법 그 자체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만을 위한 법의 문이라니. 굉장히 묘한 생각이 듭니다. 

 

근본적으로 이 시골 사람은 왜 법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적 가치나 이상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법을 구할진대」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보듯, 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어떠한 이상 혹은 가치이며, 문지기가 말하듯이 개인의 문이 있다 치면 이 길은 각 개인들이 추구하는 그들만의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들을 보면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삶을 강요당하며, 삶은 부조리함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허무와 절망, 죽음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강요받고 부조리가 만연한 현실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제가 소설 「다리」의 주인공이라면 구원을 바랄 것 같습니다. 혹은 인간적인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 부조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 그리고 이 죽음의 길에 있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도록 해보라구.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걸. 그런데 나로 말하면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거든. 방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 」

 

구원의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길조차 우리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지기가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지기는 자신의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면 더 강한 문지기가 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마음에 걸리는 말입니다. 금지라니. 나를 위한 문이지만 들어갈 수 없고 추구할 수 없으며 나의 길에 대한 결정권은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문지기는 「내 금지」라고 말합니다. 나를 위한 문인데 말이죠. 결국 구원을 추구하는 이 길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강요받는 것은 마찬가지 같습니다.

 

마침내 시력이 약해져 그는 자기의 주위가 정말로 어두워졌는지 아니면 눈이 자기를 속이는 것인지 분간을 못한다. 그런데 이제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하게 알아본다, 법의 문들로부터 끌 수 없게 비쳐 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을.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 구원의 길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치고 오래도록 기다리지만 그 끝은 허무와 죽음입니다. 법(法)의 문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법의 문들로부터 비쳐 나오는 그 빛이 이렇게 찬란함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아보다니. 이 구원의 길을 추구하는 것 역시 허무와 죽음으로 끝나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요. 결국 카프카에게 있어서 어떠한 진리 혹은 구원을 추구하는 것 역시 금기이며 허무와 죽음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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